1.금요일에는 반차를 냈다.
약 167번째의 사춘기.두통이 시작되었고 불면은 지속되는 날들이었다.
당장 떠날 수 있는 곳을 탐색하다 강화도의 한 펜션을 골랐다.
해가 붉게 붉게 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새로 뚫린 에코하이웨이는 네비에도 잡히지 않아,
그 곧게 뻗은 길을 달리다보니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1시간 30분여를 달려 도착한 펜션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아늑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침대 머리맡 창으로 보이던 커다란 나무.
바람이 불때마다 들리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웠다.
펜션 여행이 무어 별다를 것이 있나.
목살과 대하,조개를 구워먹고 와인잔에 얼음을 가득채워 와인마냥 매취순을 마셨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며 대구 육상선수권대회를 보고
소세지를 구워 블루베리크루져와 함께 슈퍼스타케이3를 보았다.
그리고 연보라색 이불을 돌돌 말고 다음 날 아침까지 깊은,좋은 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좋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나는 이 짧은 여행동안 일상에서의 고민을 모두 털어버린채
순간순간의 과제-김치찌개 끓이기,상추 씻기-등에만 골몰할 수 있었으니까.
2.여행에서 돌아온 후 미드를 틀어놓고 솰라솰라하는 영어대사를 자장가 삼아
마루에서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잤다.쿨쿨.한시간쯤 꿀같이 단잠을 자고,
멀리 이사를 갔어도 꼭 우리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오랜 친구 K양의 호출을 받아
간만에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고등학교때 트럭에 서서 먹던 그 맛 그대로. 10여년이 흐른 지금 그 트럭떡볶이는
우리동네 제일가는 맛집이 되어 번듯한 가게도 생겼지만 우리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튀김을 뭐 시킬까 티격태격하는 마음만은 여고생들.
날씨가 하도 눈부셔 배도 꺼트릴겸 올림픽 공원을 느릿느릿 같이 걸었다.
남자들 군대얘기마냥 해도해도 재밌는 우리의 유럽 여행 얘기를 하면서 다시 깔깔 웃고,
또 다시 배고파졌다며 공원 안 빵집에서 도넛이랑 스콘도 다시 사먹고.
3.일요일에는 남자친구가 2주째 알바를 하고 있는 약국에 놀러갔다.
네비를 잘 못쓰시는 택시기사 할아버지에게 뒷자리에서 소리 높여 네비 사용법을
설명드렸으나 결국 내려서 40분간 코앞에 약국을 두고도 근처를 헤매야했다.
일요일이라 한가했던 약국,그래도 간간히 손님들이 들어와 나는 조제대 뒤에 빼꼼 숨어서
아직 녹슬지 않은 조제 솜씨를 선보였다.헤헤.
본업이 아니라 그런가,오랜만에 조제하니 어찌나 재밌던지.
마감하고 놀러간 곳은 어린이대공원.
원숭이를 좋아하는 남자친구,활력있는 원숭이를 보고 싶어했건만 저녁 시간이라
이미 실내장 안에 갇혀있었다. 회색 콘크리트장 안에 갇혀있는 원숭이들의 눈빛이
어찌나 슬퍼보이던지,참 인간의 이기심이란게 지긋지긋해지더라.
그 와중에 옆에서 '내가 구해줄께! 기다려!'를 외치는 남자친구-_-.
암사자를 조용조용 쫓아다니는 귀여운 숫사자의 로맨스도 보고 오글오글붙어 자고 있는
미어캣들도 보고 돌아나오는 길, 마잭 오빠의 빌리진에 맞춰 분수쇼가 한창이었다.
흥에 겨워 춤을 추니 나를 부끄러워하는 남친군.......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지.
왜냐면 날씨도 하늘도 너무 멋졌거든.
쓰고나니 꽤 즐거웠던 주말이었다.알차게 보낸듯해 마음이 뿌듯하네.
어제의 망령과 내일에 대한 불안은 잘 틀어막고 오늘도 즐겁게 보내야지.